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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진실과 허위
황장엽 회고록
소설 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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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1923년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신 고 황장엽선생은 1949년 10월부터 5년간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하셨으며 귀국 후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강좌장으로 북한사회에 명함을 내밀었다.

1958년 김일성 서기실(남한의 대통령비서실) 서기로 임명되었고 1961년 9월 노동당 4차 대회 김일성 연설문을 집필하면서부터 사회주의 건설이론과 철학연구에 몰두하였다.1965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북한 최초의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황장엽선생이 1968년 말에 체계화하신 ‘인간중심 철학관’ 줄거리는 모든 사물은 인간을 위해 필요하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운명개척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철학론이다. 이것이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으로 변형되고 1974년 2월 김정일의 비밀지시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탈바꿈하게 된다. 황장엽선생의 ‘인간중심 철학관’에 뿌리를 둔 ‘김일성주의’는 오늘날 북한사회의 통치이론이 되었다.

만약에 황장엽선생이 남한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60여년 3대 세습으로 이어지는 김일성 독재사회에 커다란 업적으로 공헌하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지금도 그것을 죄악으로 보는 사람들이 남과 북에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의 천륜을 끊은 지난 1997년 2월 김정일 체제와 등을 돌렸기에 북한에서의 공적은 없다고 봐야한다. 노동당 서열순위 10위권의 고급간부 황장엽 국제비서가 남조선의 서울로 도망갔기에 북한에서 그에 대한 업적이 새로 생겼다.

김정일은 “가족을 포함하여 황장엽 관계자 2,000명을 숙청하라.” 고 특별지시를 내렸고 “가장 너절한 변절과 배신으로 현대판 유다로 저주받는 황 가놈,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며 그를 암살하기 위해 갖은 테러명령을 내렸다. 자살한 부인과 아들, 그리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사돈 팔촌간인 먼 친인척들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피값을 역사는 계산할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많은 인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는 정말 무서운 나라이다. 조선시대도 이러지 않았다.” “노동당 비서까지 하던 사람이 남조선으로 갔으면 이 나라(북한)는 망한 나라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황장엽 노동당국제비서”를 기억하며 “노동당 비서도 남조선으로 갔는데 나라고 못 가겠는가?” 하면서 기회를 보는 노동당간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황장엽선생이 북한에 남긴 업적이라면 바로 이것이다. 김정일 파쇼정권아래서 인권이 뭔지, 자유가 뭔지 조차 모르는 간부들과 인민들에게 생명 존중의 사회, 민주국가에 대한 작은 희망의 불씨를 남겨놓았다.

 

- 남한

철학자 황장엽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자신의 이론을 새로 정립하셨다.
자신이 주장하는 “인간중심철학”은 인류역사의 흐름에 관하여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했고 대부분의 사상가와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역사발전설이 아니라 인류에게는 오직 민주주의의 길,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의 길밖에는 없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 다음에 올 사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라고 한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은 공상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는 올수도 없고 와서도 안 된다.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 라고 단언하셨다. 주체사상의 실체를 몰랐던 남한의 친북좌파들은 황장엽선생의 망명을 통하여 인간중심철학과 김정일의 실체를 정확히 깨달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친북에서 반북 혹은 중도의 길을 택하게 되었음은 그가 남긴 커다란 업적이다.

또한 황장엽선생이 서울에서 남긴 20여종의 각종 저서와 사진 등은 폐쇄사회 북한과 독재자 김정일을 연구하고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와 교과서가 되었다.

“김정일 독재체제는 언젠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고 확신하신 황장엽선생의 증언이 2만여 탈북자들이 외치는 함성보다 설득력이 강했기에 남한국민들에게 끼친 영향도 결코 작지 않았다.

지난 1997년 4월 서울공항에 도착한 황장엽선생은 남한의 발전상에도 놀라셨지만 당시 연평균 100명 가까이 내려오는 탈북자들을 보며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탈북자이라고 우리는 모두 동지라고 하면서 탈북자사회의 단결과 통합을 주장하시였다. 1999년 2월 창립된 <탈북자동지회> 명예회장직을 기꺼이 맡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본다.

고령의 나이에 집필과 강연을 멈추지 않으셨던 황장엽선생은 2007년 4월 <북한민주화위원회>를 만들며 탈북단체들의 결집과 왕성한 활동을 호소하였다.

어쩌면 <자유북한방송>, <NK지식인연대>,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탄탄한 탈북자단체가 있기까지 황장엽선생의 지침과 훈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 해외

1997년 2월 베이징에서 있은 “황장엽선생의 대한민국 망명사건” 그 자체가 국제사회의 톱뉴스가 되었다. 노동당 국제비서인 황장엽선생의 남한 행은 그의 직함 그대로 국제사회가 지켜보았다.

세계가 깜짝 놀랐고 허무했다. 북한판 성경과도 같은 김일성주의를 만든 장본인이 투항하고 민주국가로 망명한 사실 하나만도 엄청난 특보였다.

북한이 대외적 사업으로 세계 여러 나라들과 지역들에서 조직 운영하던 <주체사상연구소>들이 해체되고, 그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신흥세력 나라들과 국제사회에 퍼져가던 주체사상은 하루아침에 신기루가 되었다.

황장엽선생의 서울행을 보며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찼던 조선노동당과 김정일의 실체는 온 천화에 낱낱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김일성주의와 주체사상이 가짜이며 김정일은 김일성주의의 창시자가 아님도 밝혀졌다.
세계 각국의 많은 주체사상 신봉자들과 외국인들이 “황장엽의 서울망명”을 보며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장엽선생은 2003년 10월 미국을 방문하여 “김정일은 수백만 북한주민들을 무참히 굶겨죽이고 북한 땅을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든 전대미문의 독재자” 라고 폭로하였다.

개인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 그보다 인류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셨던 황장엽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북한체제의 공포정치와 감시, 정치범수용소, 주민탄압과 북한주민들의 극심한 굶주림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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